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민국의 핵무장 (문단 편집) === [[박정희 정부]] === 북한은 1955년 '핵물리연구소'를 창설하고 1956년 [[소련]]과 원자력협정을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164187.html|체결하였다.]] 1962년에는 소련으로부터 연구용 원자로인 [[https://news.joins.com/article/22450408|IRT-2000를 반입하였다.]] 이는 소련이 IRT-2000을 처음 개발한지 4년 만이다. [[이승만]] 정권에서는 1955년 미국과의 원자력협정을 체결하였고, 다음해부터 2~3년에 걸쳐 120여 명에 달하는 '원자력 유학생'을 미국에 소재한 '아르곤 국립 연구소(Argonne National Laboratory)에 파견하였다. 1957년, 아르곤 연구소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윤세윤 서울대 교수가 1956년 설치되었던 문교부 기술교육부 원자력과의 과장에 취임한다. 같은 해에 국회에서는 '원자력법'이 제출되어 58년 통과되었으며, 1959년에는 원자력원과 원자력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이승만 정권 퇴진 후인 1962년, 한국의 최초 원자로인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 2(Triga Mk. 2)'가 들어섰다. [[http://allinkorea.net/sub_read.html?uid=8377§ion=section12|#]] 이후 [[박정희]] 정권 치하의 1969년 7월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었다. 한국 정부는 곧바로 정상회담을 요청해 동년 8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정희와 닉슨이 회담을 하였다. 이 자리에서 닉슨은 [[주한미군]]의 변화에 대해 사전통보하겠다고 하였다. 1970년 3월,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박정희에게 주한미군 2만명을 이듬해까지 철수하고 1975년에 완전 철수할 것을 통보했다. 베트남전의 대규모 국군 파병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한국에서 미군 철수가 가시화되는 단계에 이르자 박정희 대통령은 큰 충격을 받았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58197.html|#]] 1970년, 무기개발위원회(WEC)와 [[국방과학연구소]](ADD)가 [[http://www.imbc.com/broad/tv/culture/cantell/1252747_1590.html|설립되었고, 무기개발위원회에서 핵무기 개발이 위원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한편 ADD에서는 무기 국산화 사업인 번개사업을 시작하였으며 1970년대까지 [[이스라엘]] 수준의 자주국방을 목표로 기본병기 국산화를 완료하고 80년대 초까지 [[항공기]], [[유도탄]]을 국산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청와대 제2경제수석실 [[오원철]] 전 수석이 수시로 방문해 관리했다고 한다. [[http://shindonga.donga.com/Library/3/02/13/105990/1|#]] 11대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은 박정희가 "미군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원자폭탄을 연구해 보자. 핵무기를 개발하다 미국이 방해해 못 만들게 되면 언제든지 만들 수 있는 수준의 기술이라도 갖춰놔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고 회고하였다. 핵무장은 한국 경제가 중화학공업 시대로 전환한 1973년부터 본격화되었다고 한다. 오원철 수석 또한 1972년 자신과 김정렴 비서실장을 집무실에 불러 "일본 정도의 핵기술을 확보하라"고 지시하였다고 증언하였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12/2010011200988.html?Dep0=chosunmain&Dep1=news&Dep2=headline2&Dep3=h2_05|#]]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대사는 미국이 73년 한국의 핵무장 동향을 처음 파악했다고 했다. 핵무장을 위해 한국 정부는 당시 [[미국]]과 핵기술의 분배를 놓고 이견이 있던 [[프랑스]]에 접근했다. 1972년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이 방불(訪佛)하고 73년 김종필 총리가 방불했으며, 뒤이은 1975년 프랑스의 국영원자력기업 SGN(Saint Gobin Techniques Nouvelles)과의 재처리 기술 공급 계약이 체결되면서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은 성공을 눈앞에 뒀다. 이 계약이 실행되었다면 연간 20kg의 [[플루토늄]] 추출이 가능했다고 한다. 동시에 박정희의 특명으로 외국에 나가있는 우수한 한국인 과학자들이 귀국하였고, 오원철 수석은 [[캐나다]]를 방문해 플루토늄 추출이 용이한 캔두(CANDU) 원자로의 도입을 진행했다. 한국보다 먼저 캔두 원자로를 도입한 [[인도]]와 [[파키스탄]]이 결국 핵무장한 것으로 볼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적지 않았다. 또한 한국은 이 시기 나이키-허큘리스 미사일의 도입과 국산화를 진행하였다. 즉, 프랑스에서 재처리 시설, 캐나다에서 중수로, 미국에서 발사체 기술을 확보해 핵개발과 핵 체계를 단번에 구축하려는 의도로 풀이되었다. 1973년, 박정희는 중화학공업화정책선언을 하면서 [[경남]] [[창원]]에 종합기계공단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였다.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ustry/delegate1970D.do|국가기록원]] 오원철 수석이 1972년 건의한 안을 대통령이 재가하는 방식으로 진행한 점, 핵개발 관련 기업인 [[현대양행]]이 창원에 소재한 기업이었다는 점, 이 선언 직후 해당 지역에 원자로 제조시설이 들어선 점, 1981년까지 무려 8년여에 이르는 장기적인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던 점은 중화학공업과 핵무장이 동시 진행중이었으며, 기술의 내재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1974년, [[인도]]가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의 압박이 거세져 한국 원자력 연구소, 국방과학연구소, 대전기계창 등 핵무장 관련 시설 뿐 아니라 [[청와대]], [[대한민국 국방부]], [[과학기술처]] 등 국가부처의 부서장에게까지 [[주한미국대사관]] 직원들과 [[미국 중앙 정보국|CIA]] 요원들이 따라붙어 명시적인 중단 압력을 가했다. 오원철 수석에 따르면 여러 시설에 나누어 진행한 것은 미국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7개 프로젝트로 나누어 오직 컨트롤타워인 청와대에서만 정보판단이 가능하도록 했다고 한다. 1975년, 박정희 정권은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하였으며, 문제의 캔두 원자로인 [[월성 원자력 본부|월성 1호기]]가 무사히 착공되었다. 이듬해 1976년, 박정희는 "정 끝까지 가겠다면 '''결정적인 제재'''를 가할 수 밖에 없다"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했다. 도널드 그래그 전 대사는 "2011년 북한에 대해 미국이 핵개발 억제를 위해 애쓰는 것과 똑같았다."고 미국의 중단압박의 방식을 묘사하였다. 또한 김종필 전 총리는 미국의 정보력이 뛰어났다기보다는 "한국 내부 스파이들이 CIA에 고자질"했다고 평가했다. 그와 함께 프랑스와의 재처리협정은 파기되었으며, 1977년 무렵 핵개발은 중단되었다. [[https://news.joins.com/article/18210193|#]] 도널드 그래그 전 미 대사는 그 이후 한국의 핵무장 시도가 없었다고 단언하고 있다. 하여간 미국의 압박이 어느정도였냐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파기하겠다는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보면 되었다. > "우리도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실제로 (핵무기를) 개발하지는 않고 있으며, [[핵확산금지조약]]을 준수하고 있다. 만약 미국의 [[핵우산]]이 철회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핵무기의 개발에 착수할 수밖에 없다."[*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영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We have the (nuclear) capability, but are not developing it and are honoring the 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If the US nuclear umbrella were to be removed, we would have to start developing our nuclear capability to save ourselves."] >---- > 1975년 6월 12일, [[박정희]] 전 대통령, 미국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 中 하지만 [[오원철]] 제2경제수석의 진술에 따르면 프랑스와의 계약 파기와 관련없이 재처리기술도 확보되어있는 상황이었으며, 핵심 기자재들을 밀반입하는데에 성공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12/2010011200988.html|#]] 1978년에는 미국의 청와대 도청사건이 외교적 파문을 낳았다. 1979년 2월, 오 수석을 포함한 핵개발을 전담하는 책임자들이 청와대에서 비밀 회동을 가졌고 박정희 대통령은 핵개발이 88% 진척되었다고 보고받았으며 모종의 결단을 문서화하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핵무기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상징적 차원에서도 핵무기 관련 문서에 일절 서명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오원철 수석의 증언이다. 자세한 내용은 노코멘트하고 있으나, "핵을 무기화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회의였다는 설명으로 놓고 볼때 이미 1970년대 초에 설정한 핵무장을 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해놓자는 목표는 사실상 달성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그러나 박정희는 그즈음 핵 개발 시도로 인해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것 아닌가? >"한국은 10년간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한국은 베트남전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얻은 외화로 새마을운동을 벌이는 등 경제 발전을 위한 '시드 머니[* 종잣돈, 밑천]'로 활용했다. 그러나 [[베트남 공화국|또 하나 베트남이 무너지면]], [[도미노 이론|도미노처럼 공산화가 번져]] 한국도 위험하다고 봤던 것도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의 한 이유였다. 그런데 내가 1973년 한국에 왔을 그때, 미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박정희는 이걸 보면서 미국과의 동맹에 대한 믿음을 잃기 시작했다. 그가 핵 개발에 나선 이유다." > >- 핵 개발 시도가 당시 한-미 관계 악화의 주원인이었나? >"물론이다. 박정희는 '나는 베트남에 30만 명을 보냈다. 그런데 미국을 믿을 수 없다.[* [[베트남전]], [[국공내전]]에서 베트남전은 파리평화협정후 결국 미국 동맹국들은 결국 철수하면서 북베트남이 쳐들어와 공산화 되었고 국공내전에서는 초반에는 국민당이 우세했지만, 미국이 정전협정으로 오히려 공산당을 힘을 키울 시간을 주었기에 중재를 제대로 못 했다고 비판받고 있다. 6.25 정전협정때도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해야하며 작전권 회수해서 단독으로라도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미국은 경악하며 미군 철수로 위협했다. 사실 미국도 오랜전쟁으로 사람들이 시위하고 민심이 안좋았다. 이승만은 이번에는 유화정책으로 바꿔서 정전협정을 따른다고 말하며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승만은 사실 처음부터 안전보장 없는 휴전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정전협정만 하면 미군이 철수했을 때 다시 공산군이 쳐들어오기에 정전협정을 반대하면서도 한국의 안보를 보장해달라하면서 속내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생각하고 있었다.[[https://www.much.go.kr/L/AQkhKt2MH3.do|#]] ] '''우리 스스로 우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970년대 동북아시아에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국민들을 고문하는 나라가 있었다. 사람들은 북한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다. 그건 남한이다. 1970년대의 남한과 오늘날의 북한은 여러 점에서 흡사하다."[* 이 언급이 논란이 되기도 하나 전반적인 인터뷰는 객관적인 논조이다. 예컨대 다른 문단에서는 "북한은 1950년대에 남한보다 국력이 훨씬 강했다.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모두. 1960년대에 북한의 침략에 대한 남한의 공포는 매우 컸다. 또 당시 김일성은 북한에서 매우 강력한 지도자였고, 소련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당시 남한의 장면 정부는 매우 진보적이었지만, 강력하지 않았다. 북한이 이를 틈타 공격한다면, 남한은 무너졌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박정희의 쿠데타 동기 중 하나가 됐다고 본다."라는 식으로 군사정부의 등장에 대해서도 가치 판단보다는 당대의 현실적인 상황들을 지적하고 있다. CIA 출신 인사이기도 하고. 인용한 내용은 인터뷰 중 핵개발과 관련된 단락의 전체 원문을 가감없이 가져온 것이며, 다른 주제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본문을 읽어볼 것.] > >- 박정희가 핵 개발에 나선 시점이 언제인가? >"대략 1972년이다." > >- 미국이 곧바로 그 사실은 알았나? >"아니다." > >- 언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나? >"1973년이다." > >- 어떻게 알게 되었나? >"그건 말하기 곤란하다."[* 그런데 이후 [[코리아 게이트]] 사태에서 [[워싱턴 포스트]]가 [[청와대]]를 '''[[도청(범죄)|도청]]'''했다고 폭로하면서(워싱턴 포스트 1976년 10월 27일자), 박정희의 핵 개발도 이를 통해 알게 되었다는 의견에 무게가 실리기도 했다.] > >- 그래서 어떻게 했나? >"그걸(핵무기 개발) 멈추게 했다. 나는 본국에 한국의 핵 개발을 보고했고 미국 정부는 매우 조심스럽게 중단하도록 요구했다." > >- 박정희를 어떻게 설득했나? >"우리가 북한으로부터 어떠한 공격에도 남한을 보호할 것이며 따라서 남한이 핵무기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재확인시켰다." >---- >1970년대 [[미국 중앙 정보국|미 CIA]] 한국지부 총책임자이자 1989-1993년 주한 미국 대사였던 도널드 그레그(Donald Gregg)와의 [[http://m.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477753.html|2011년 인터뷰]] 중에서 10.26 사건 발생 직전, 박정희는 우라늄 농축 분말인 [[팔산화삼우라늄|옐로케이크]](yellow cake)를 선물받았다. 그러나 직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은 급작스럽게 중단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